당인저택은 에도 시대, 쇄국 정책 속에서 유일하게 외국과의 무역이 허용된 나가사키에 설치된 중국인 거리를 말합니다. 1635년 에도 막부는 중국 상선의 입항을 나가사키 한 항구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기독교도가 아닌 중국인은 나가사키 시내에 잡거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일본을 왜구의 거점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중국인의 일본 도항은 금지되어 이 시기에 일본으로 도항하는 중국인의 수는 적었습니다.
그 후, 청나라가 대만의 정씨 정권 대책으로 천계령을 발포하고 있던 동안, 일본으로 도항하는 중국인은 대만 혹은 동남아시아로부터의 도항이 주였기 때문에, 도항하는 중국인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84년 청나라가 천계령을 철폐하고 다음해 이후, 중국 상선이 다수 내항하게 되면서 밀무역이 증가하여 나가사키 봉행소는 중국인의 거주 지역을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688년, 나가사키 교외에 있는 주젠지 마을에 막부가 소유한 어약원의 땅에서 당인저택의 건설이 시작되어 다음해 완성되었습니다. 당인저택은 약 9,400평의 넓이에 2,000명 정도의 수용 능력을 가진 것으로 현재의 나가사키시 칸나이마치의 땅입니다. 주위는 담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대문 옆에는 번소가 설치되어 출입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데지마의 네덜란드인이 엄중하게 감시된 것에 비해 중국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이 허용된 것이 특징입니다. 데지마의 건설비가 나가사키의 마을 사람들의 지출로 충당된 것에 비해 당인저택의 건설비는 나가사키의 마을 사람들이 막부로부터 돈을 빌려 충당했습니다.
1698년의 대화재로 고토마치와 다이코쿠마치에 있던 중국 배의 화물 창고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창고에 눈이 잘 닿도록 당인저택 앞바다를 매립하여 중국 배 전용의 창고 구역을 조성했습니다. 이 지역이 신치라고 불리게 되어 현재의 나가사키 신치 차이나타운으로 발전했습니다. 1784년의 대화재에서는 당인저택 전체가 간제이도를 남기고 전소되었으며, 대화재 이후 당인이 자비로 거주지 등을 건축하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1859년 개국으로 인해 당인저택은 폐허화되었고 1870년에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거주 중국인은 인접한 나가사키시 신치마치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여 나가사키 신치 차이나타운이 되었습니다.
당인저택의 유적으로는 메이지 시대에 수복 개장된 토신당, 관음당, 천후당, 1868년에 복건성 천주 출신자들이 세운 구 팔문회소, 1897년에 개장, 개칭된 복건회관 정문이 남아 있습니다. 당인저택 터는 에도 시대 쇄국 정책 하에 나가사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국인 거리의 유적지이며, 역사를 좋아하거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방문해야 할 관광 명소입니다. 당시의 번영을 상상하며 역사를 느껴보세요.